아름다운 연쇄살인자 이야기

 

# 김지훈작가 그림의 특징

김지훈은 모든 걸 자유자재로 그릴 수 있는 작가다. 구상부터 추상까지, 대상도 소재도 주제도 마띠에르도 분위기도 재료도 다채롭다. 무엇으로도 한계짓지 않는다. 그림을 그릴 적엔 마음 속에 이미지를 품고 있다가 즉흥연주하듯 재빠르게 거침없이 빼어내는 스타일이다. 이렇게 몸으로 영감으로 꺼내놓은 그림속에는 원초적 에너지가 도사린다. 치열하게 훈련된 테크닉 덕분인지 화폭의 큰 흐름을 휘저어가면서 표면의 섬세함도 절묘하게 잡아낸다. 원초적이고 격렬히 서늘하며 치밀하게 절제되어있는 속성은 이런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공통분모다. 그의 그림속엔 이상하게도 감정이 결여되어있다. 작가는 감정을 완전히 탈색시켜버리고 첨예한 이성의 날 위에 서서 대상을 원초적으로 포착해낸다. 그래서 빨리 그려낼 수가 있는걸까. 작업을 지체하게 만드는 속도결정단계는 대체로 감정이니까. 그의 그림 가운데 감상자는 감정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감상가운데 감정이 걸리지 않으니 군더더기가 없다. 작가의 몸이 내어놓은 에너지가 손실없이 빠르게 흡수되며 치고들어온다. 어떤면에서 감정은 구질구질하고 뻔하다. 그래서 김지훈의 그림은 에너지가 높은 동시에 세련되었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이런 특징은 작품의 관조적 속성을 두드러지게 만든다. 감정을 차단해둔 화면은, 보고 있는 것에 대해 내 존재를 관여시키지 않고 가치판단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이지적인 태도로 보이기도 한다. 스스로를 넘어서서 보겠다는 자세다. 그래서 그가 만들어낸 장면들은 본인 존재를 넘어서고, 나아가 화폭에 담긴 대상 자체를 또한 넘어선 어떤 근원과 접선하고 있는 것만 같다.

김지훈작가의 관조는 두 종류로 발휘된다. 그의 이성은 인간과 생명과 세상에 대한 관조와, 아름다움(미) 자체에 대한 관조가운데 기능한다. 영감에 의해 에너지를 뿜어내면서도 이성의 고삐를 절대 놓치지 않고 키를 노련하게 움직여가는것은 김지훈의 특징이다. 그는 음악에 온전히 적셔진듯 하면서도 루바토가 적용된 음 하나의 미분된 박자까지를 정확히 계산해내는 프로연주자를 닮았다. 그의 그림속에선 팔딱거리는 날것의 생동감이 첨예하게 치밀하도록 발현된다.

 

# 감정이 없다는 것은 - 인간의 생존 전략

김지훈 그림의 가장 독특한 자리는 감정이 쏙 빠져있고 이성과 본능만 남아있다는 점이다. 독특한 자리에는 핵심이 있다. 그러니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다. 감정, 인간의 실존적 나침반이기도 한 감정이 왜 그에게서는 누락되어있을까. 감정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인간이 감정을 얼려내고자 다짐하는 자리를 생각해보아야겠다. 당신은 언제 차가워지는가. 너무나 믿었던 벗에게 배신을 당할 때. 달다고 삼킬땐 언제고 쓰다고 뱉어내어버릴 때. 가장 아플 적에 혼자 울음을 삼켜야만 할 때. 완전히 이해관계에 따라 취급당할때. 나의 좋은 마음이 오히려 비수로 돌아올 적에. 누군가의 지독한 악함을 볼 때. 세상이 만만한 게 아니구나. 나는 혼자구나. 아 내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버려질 수 있구나. 사람은 그렇게 차가워진다. 이렇게 심장이 단단해진다. 관계인 줄 알았는데 계약이었을 때. 나의 아픔이 약점이 되어 물어뜯길때. 나의 순수하게 내어놓은 마음이 너무나 초라해졌다고 느낄 때. 그렇게 피투성이가 되어 견딜 수가 없다고 느낄 적에 이렇게. 너무 여리기 때문에 다치지 않기 위해서 누구보다 딱딱하게 마음을 얼려둔다. 너무나 상처를 입은 바로 그 때에. 대신 정신을 똑바로 차린다. 그래야 살 수가 있으므로. 나를 숨긴다. 그래서 감정이 없는 사람은 없지만 감정을 있는 그대로 꺼내놓고 살아가는 사람도 없다. 누구에게나 부당한 대접을 받아도 웃으며 넘겨야 하는 자리, 슬픔을 누르고 긍정을 가장해야 하는 자리가 있다.

김지훈의 광대 그림들은 여기에 단서를 준다. 그가 그린 사람은 대부분 광대다. 보통 작가가 사람을 어떻게 그려내는지에 그가 본인자신이 포함된 인간이란 존재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가 많은 부분 드러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김지훈작가는 인간을, 살기 위해 진짜 나를 숨기고 웃는 분장을 얼굴위에 기괴하게 그려두고 타인에게 보여주어야만 하는 광대로 인식한다고 볼 수 있다. 광대들 몇십명이 우르르 모여 정면을 경직된 단체사진처럼 바라보고 있는 대작은 유난히 우리 인간모두가 광대라고 외치는 것만 같다. 그의 시선속에서 우리는 삶 가운데 나를 지키기 위해 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며 분장을 해서라도 웃는 얼굴을 유지해야 하는 운명인 것일까. 김지훈이 그린 광대들은 화려한 분장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비통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림 속 광대들은 녹아내리듯 아래로 흐르고 있는데, 마치 존재가 소멸되어가는 것만 같다. 그의 광대들은 세피아빛이거나 얼굴에 그린 분장이 채도를 끝까지 올려 대비되어 있거나. 그는 광대들을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는 사람처럼 그렸다. 나의 감정을 지우고 웃는 얼굴을 입는 일은 이토록 내 존재를 휩쓰는 깊은 고통을 수반하지만 그럼에도 벗을 수 없는 필연적 생존투쟁이다. 한편 컬러로 그려진 그의 광대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충혈되어 눈물이 고여 있는 눈동자가 동물의 것으로 치환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인간에 동물이 중첩되어 있다. 동물을 바라볼 적에는 생명체가 필연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약함 이라는 속성이 그러헤 잘 보인다. 약해서 필사적으로 생존적이다. 동물을 볼 적에 우리가 느끼는 하염없는 안스러움과 애틋함을 작가는 인간존재에게서 동일하게 느끼는 지도 모른다.

 

# 생명체의 자리 - 생존의 운명

광대의 눈동자를 통해 감상자는 김지훈의 동물들이 인간의 은유라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의 동물 그림들을 살펴보면, 생존 이라는 표현을 볼드 대문자로 크게 써 놓은 것만 같다. 오래도록 굶주려 바짝 독이 오른 마른 멧돼지가 물을 마시는 장면에는 폭풍전야같은 고요함이 응축되어 있고, 오늘의 먹을 것을 위해 나는 새를 잡아채어 박차오르는 맹수의 재빠른 모습에는 필사적인 에너지가 깃들어있다. 자연 속 모든 존재는 서늘하게 외롭다 누구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아니 모든 환경이 나의 생을 지워내는 가운데 하루하루가 치열하다. 살아 있기 위해서는 존재를 걸어야 한다. 오늘 먹을 것이 있다고 해서 내일 먹을 것이 있다는 보장은 없다. 오늘 살아남았다고 내일도 잡아먹히지 않으리란 건 아니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래서 날마다 생존이다. 치열한 생존. 김지훈의 그림 속 동물들 몇은 머리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자꾸 목이 없는 걸 그린다. 분명히 살아있는데 머리가 없다. 머리는 이성과 존재의 고유성과 감정과 영혼의 자리인데 삭제한다. 그러면 몸통만 남는다. 파랑 바탕에 그려진 새 그림-a nameless bird-을 들여다보면 역시 필사적으로 생존적인 몸통이 버티고 있을 뿐이다. 녀석의 몸은 위에서 아래로 끌어내리는 파랑바탕속에서 경계가 흐려지도록 번져있다. 뭔가가 새를 휩쓸고자 하는데 몸이 휩쓸리진 않았다. 나뭇가지를 다부지게 붙든 발톱, 몸통 중앙부에 두껍게 얹어진 흰 물감표현과 둥근 양감의 몸통은 그를 지워내려는 어떤 환경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고자하는 생명의 질량과 의지를 드러내주는 것만 같다. 감정과 개별존재가 드리워지는 자리인 얼굴이 없어진 것은 이 얼굴마저도 지워내고 생명의 증거인 몸통만을 남겨두고야 마는 환경의 무자비함을 보여준다. 머리없음은 또한 이 살아남기가 이성이나 감정의 문제가 아닌 몸 으로써 헤쳐나가는 치열한 실존의 일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의 동물그림들을 마주하는 감상자는 이런 종류의 생존이 단지 이 녀석만의 이슈가 아닌, 몸과 살갗을 지닌 우리 보편 생명들의 이야기라는 데 이르게 된다. 이것은 김지훈이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이해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한 대가로 스스로를 고스란히 내놓아야 하며, 인생에 대한 대가로 인생을 바쳐야"(비스와바 쉼보르스카)하지 않은가. 생존이라는 은유는 어쩌면 우리의 하루하루 살아가기다. 우리는 모두 태어나 어딘가로부터 삶을 부여받는 동시에 죽어가기 시작하고 살아가는 동안은 부단히 살아남기 위해 애써야 하는 운명을 지녔다. 동물에 인간이 투사되며 동물의 생존이 인간의 생존과 연결되어 다루어지는 대목들을 통해 감상자는 나의 생존투쟁이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닌 자연과 연결된 필연임을, 커다란 자연 법칙의 일부로 인정하고 시인하게 된다.

  

# 자연의 비밀 - 관조하는 자리

김지훈이 인간의 슬픈 생존투쟁을 자연속에서 이해하는 부분은 김지훈 작품의 격을 높이는 대목이다. 그는 제 아픔을 제 불쌍한 처지로 매몰시키는 대신 모든 생명을 지닌 존재의 아픔으로, 그리고 자연의 법칙으로 확장하여 끌어안는다. 내 존재를 지워내는 역풍속에서 맞서는 생존의 시간들은 사실 나만의 것이 아닌 자연의 법칙이라는 커다란 질서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 자연 속 모두는 치열한 생존자들이고 생존자들의 고통은 자연의 섭리이자 질서라는 것. 이 안에서 비로소 그는 스스로를 뛰어넘어 커다란 질서 속으로 포섭된다. 자연풍경을 그려둔 김지훈의 작품들은 그래서 오묘하다. 이 모든 생존자들의 수레바퀴를 돌려대는 자연은 냉혹하고 무심하며 무한히 커다랗고 장엄하게 아름다워 두렵다. 이런 맥락 속에서 세상을 보는 일은 자신을 보는 일이고 자신을 보는 일은 세상을 보는 일이 된다 .김지훈은 계속 본다. 자연법칙 속 일부인 그는 숨을 죽이고 세상을 바라본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비밀을 말해줄 것만 같다. 신비롭다. 표면 너머의 섭리를 꿰뚫는 것만 같다.<detached landscape> 이렇게 보는 것은 비로소 나 아프다고 내가 불쌍해서 우는 대신에 모두의 자리를 거리를 두고 이해할 수 밖에 없는 자리를 만든다. 생존자들을 품은 자연은 숙연하고 무자비해서 아름답다. 이상하게 따뜻하기도 하다. 그렇게 그는 오늘의 불안을 바라본다. 환경과 대립하는 대신에 내가 자연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데서 도약이 일어난다. 루하루 생존하는 것은 지난하지만 아름다운 일이라는 데 다다른다. 그래서 김지훈은 생존적이지만 조급하지 않다. 모든것은 자연의 법칙일 뿐이다. 그의 필사적인 작품 가운데 서린 기품은 이렇게 인정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자연의 법칙 그 너머에 맞닿고 있다. 그는 다만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 똑바로 본다. 자연을 그려낸 김지훈의 그림은 생존의 무대로서의 섭리를 내재하고 있다. 모든 것이 자연의 이슈임을 알아차린 작가는 계속 그저 이 비밀을 바라볼 뿐이다. 더하거나 빼거나 채색하지 않고 . 그래서 순응이다. 생존은 모든 생명자들의 숙명이기에 그의 치열함은 자연에의 순응이자 합일이다. 자연 속에서 이루어질 뿐 자연에 맞서지 않는다. 그는 이 모든것을 관통하는 자연 이라는 본질로 이 모든것을 끌어안 고 있는 것이 아닐까. 수용하고 있는 게 아닐까. 결국 김지훈의 모든 작품은 이 비밀과 내통하고 있다. 이 삶, 이 자연, 이 세상은 무엇일까. 그래서 보고 또 본다. 무자비한 생존의 날선 자리 또한 더 생생하게 본다. 김지훈 작품세계의 핵심은 자연 섭리로서의 수용과 생존자의 필사적인 고통사이의 긴장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다. 이렇게 그는 관조한다. 존재를 넘어선 것은 우아하다. 성장은 고집을 부릴때가 아니라 더 높은 선에 복종할 때 이루어진다.

  

# 메타적 진실성 - 머리를 찾는 투쟁

개인적으로 김지훈의 진실이 첨예해지는 결정적인 구석을 하나 꼽는다면, 존재를 지우라는 역풍에 맞서는 그의 실제 삶이다. 김지훈은 제 그림의 스타일을 소위 잘 팔기 위해 바꾸지 않는다. 앞서 얘기했듯이 그의 그림은 차고 강렬하고 진실되다. 행복하고 예쁜 면을 꺼내어 부각시키며 마취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저가 들여다본 본질을 담아내며 보는 이의 감각과 정신을 깨워낸다. 이런 그림은 인테리어상품으로서는 인기가 떨어진다. 목 없는 동물 그림을 방에 걸어두고 싶은 이가 어디, 많겠는가. 특히 한국에서.(가장 최근에 그의 작품을 품에 안은 주인은 독일 함부르크에 사는 콜렉터다.) 그도 처절히 안다. 그에게는 실존이므로. 혼을 담아 계속 서늘한 걸 그려 내놓는다는 것은 그가 제 작품의 인테리어 효과로서의 실용성을 포기했다는 거고 어찌보면 그림을 팔아 먹고살지 못할지언정 계속 그릴 것을 그리겠다는 거다. 그래서 가끔 김지훈은 내게 "저도 잘 팔리는 예쁜 거 그릴까요?" 라고 말한다. 나는 그러면 그림 안 걸어줄거라고 웃는다. 그도 농담이라며 자기는 그런 거 못 하지 않느냐며 웃곤 한다. 그래서 정신과 영혼, 개별존재를 의미하는 머리를 결여한 존재들의 살아남기를 그리는 김지훈의 실제 삶은 아이러니하게도 머리를 세우는 과정이다. 전시를 하자고 했더니 그는 얼마를 "땡겨서" 물감을 사고 싶다고 했다. 그가 안 팔릴지도 모르는 제 작품스타일을 고수하는 일은 돈을 "땡겨서" 물감을 살지언정 머리를 지우지 않는 일이다.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어쩌면 그가 생명자들의 냉혹한 생존메커니즘을 이토록 똑바로 바라보는 이유는 저가 처한 상황을 똑바로 보기 위해서다. 김지훈이 생존은 본래 어려운거고 머리를 잃고 몸통만 남기는 필사적인 일이라는 사실을 계속 똑바로 보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제 머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인생을 대가로 영혼을 지불하지 않기 위해서.

  

# 피하지않고 보는 일

지난 주 참여했던 모임에서 아름다운 이 하나가 내게 다가와 김지훈작가 얘기를 했다. 작년 전시에서 보았던 그의 작품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의 작품을 떠올리면 정말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느낌을 받는다면서. 생명 가진 존재들의 생존하기가 그토록 치열한 이유는 그만큼 살고 싶기 때문이다. 생존투쟁 안에는 삶에 대한 의지가 들어가 있다. 생은 눈부시다. 김지훈은 똑바로 바라보고 깊은곳으로부터 비밀을 풀어낸다. 냉혹한 현실을 인지하고 그 위에 똑바로 서 있다. 생존은 그런 거니까. 산다는 건 그런 거니까. 근대 이후 공중위생이 중요하게 부각되며 "위생"이라는 개념은 인간들 사이에서 어떤 사상처럼 자리잡았다. 물리적인 위생 뿐 아니라 우울, 고통, 울음, 악, 장애, 질병, 지저분함, 비생산, 죽음, 냉혹함, 본능 같은 것들 역시 분명 그 자리에 있을진대 어디론가 싹 치워져 좀처럼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내가 아플 적에 우리는 사라져야 하는 존재가 된 것만 같아 두렵다. 달콤하고 깔끔한 것들만 전면에 내세워지는 세상이다. 이렇게 덜 보기좋은 것들이 은폐된 세상이라해도, 있는 것이 없어질 수는 없는 법이다. 진실되지 못한 것들은 불안을 가속화할 뿐이다. 최근 김지훈은 내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어릴 적에 영화 배트맨에서 조커를 봤어요. 잭 니콜슨이 연기한 조커요. 그 조커가 너무 무서웠어요. 충격을 받았죠. 잊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렸어요. 계속 그렸어요. " 무섭고 두렵고 충격적인 것을 본 사람은 여러가지 행동을 선택할 수가 있다. 치워버릴 수도 도망갈 수도 지나칠 수도 있는데 김지훈은 그걸 보고 또 보는 사람이다. 그걸 마음에 담아내고 또 담아내는 사람이다. 그렇게 담아낸 걸 내어놓고야 만다. 아픈 것들 두려운 것들을 피하지않고 똑바로 보는 것은 그의 삶이고 그는 많은 비밀들을 알아낼 수 밖에 없었으리라. 김지훈의 작품은 착각속의 행복보다 정확하게 직시하는 비극이 더 아름답다는 증거다. 냉혹한 치열함에 포커스를 맞추고도 관조의 냉정함을 잃지 않는 태도는 가히 우아하다. 그리고 그의 진실된 시선은 그가 본 비극이 비관을 넘어서서 더 높고 본질적인 법칙과 공명하도록 만든다. 그는 세상을 보지만 그 너머의 보이지않는 질서들을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신비롭고 장엄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비인간적이고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느낌을 자아내기까지 한다. 화면의 시린 느낌은 정말로 경이로운 것을 보았을 적에 느끼는, 등줄기를 따라 흐르는 아찔함의 시린 감각과 혼동되며 감상자를 몰아간다. 세상과 삶을 직시하는 그의 시선은 생에의 강력한 의지다. 희망이다. 열정이다. 생에의 열렬한 긍정이다. 그래서 김지훈의 그림은 그렇게 뜨겁다. 우리는 똑바로 바라볼때만 나아갈 수 있다. 극복할 수가 있다. 김지훈의 아픔은 편협함을 훌쩍 뛰어넘어 저 너머의 근원적인 것에 닿아있다. 진실하고 서늘한 것 만이 달성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 누구도 탓하지 않고 내 불쌍함에 울지 않으며 제 몫의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는 한 생명체의 우아함이다. 품위다. 

​■ 오아영(갤러리A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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